(Rolleiflex wide, Distagon F4 55mm, Kodak T-Max 400, EI 800, f/16 1/125sec, with Yellow filter.
T-Max Developer, 섭씨 24도, 6분 30초 현상, Epson V750 스캔)
경계가 뚜렷한 사진이 좋다.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거. 확실한 것이 좋은 내 성격과 잘 맞아서도 그렇다.
주제와 배경간의 경계를 확실히 분리하기 위해, 기우뚱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이 꽃에만 선택적으로 떨어지길
기다렸다.
롤라이 와이드 안에는 TMAX 400, 120mm 중형 필름이 어둠 속에서 자신이 노출되기만을 팽팽히 기다리고 있다.
붉으스레한 꽃을 흑백사진에서 더 밝게 강조하기 위해 Yellow filter를 렌즈 앞에 장착하였다.
필터로 인해 어두워진 광량을 보정하기 위해 EI 800을 400으로 낮춰 계산하였다.
그리고 꽃은 Zone 7에, 배경의 나무는 Zone 3에 오도록 노출값을 EV 15 (f/16, 1/125sec)로 결정했다.
계산으로 분주했던 머릿속과 팽팽한 필름의 긴장이 “틱” 하는 셔터소리에 쾌변처럼 상쾌하게 풀렸다.
기대감에 빨라지려는 현상통의 움직임을 초 시계를 보면서 일정하게 다잡는다.
현상된 필름을 스캔 하고 인쇄를 하였다. 콘트라스트 높은, 경계가 확실한,
내 구미에 맞는 사진을 앞에 놓고 뿌듯한 성취감에 빠져든다.
성취감도 잠깐. 뜬금 없이 며칠 전 심장병으로 사망한 지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40대 젊은 나이, 내일 죽을 줄 모르고, 전날까지 멀쩡하게 환자들 치료 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걸 보면 이 세상에 생과 사만큼 경계가 확실한 것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을 잃은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는 콘트라스트 약한 삶이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바로 “아니다” 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식물인간, 밋밋한…, 언제 깨날지 모르는…, 삶… 사진…같은 단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득 내가 만약 이런 일을 당한다면? 하는 생각에 선뜻해 진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실소 한다.
“그래, 오늘 저녁은 일찍 자야겠다.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진 그리고 삶의 조화로운 경계 설정을 위해……”
